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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추도하는 강창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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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선유어 작성일21-11-06 16:07 조회3,4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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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6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長崎)시 평화공원에서 강창일 주일본 한국대사와 여건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단장 등 한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인 원자폭탄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제막식에 이어 공원 내 원폭 자료관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추도사하는 강창일 대사. 2021.11.6 hoj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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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에선 그룹 회장실에 초대 받아 칭찬을 들을 정도로 잘 나갔다. 원년멤버로 참여한 와이더댄은 스타트업이라면 누구나 꿈에 그리는 '나스닥 상장'을 이뤄냈다. 당시 한국 언론에도 와이더댄의 나스닥 상장은 대서특필됐다.시련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왔다. 와이더댄이 갑자기 외부에 팔렸고, 경제위기가 오면서 회사에서 나오게 됐다. 스타트업을 세웠지만 그간 번 돈을 모두 날렸다. 그리고 그는 삼성전자 미국 법인을 거쳐 지금은 다시 교육 관련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 특히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시련이었지만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계획대로 스타트업을 키우지 못했던 경험에서 '사람'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후 9~10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을 찾았다고 한다. 실제 그는 '맏형' 소리를 들으며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스터디 모임에 나와 후배들과의 교류를 즐긴다.50대에 접어들어 '지키는 것'이 중요한 시기에 창업에 나선 이유가 뭘까. 그는 "지키려면 도전해야한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사업을 접은 게 아니라 보류한 것"이라는 그의 말이 변명 같이 들리지 않았다. SK그룹 회장에게 받은 칭찬은 삶의 원동력▶첫 직장이 SK텔레콤이라고요."저는 한양대 전자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유학 자금이 필요했죠. 주로 월급 많이 주는 회사들에 지원했습니다. 1996년 SK텔레콤에 공채1기로 입사하게됐습니다. 월급이 다른 회사의 두 배 수준이었습니다. 2년 간 벌고 나오자고 생각했습니다."▶목표대로 2년 만에 퇴사하셨나요."아니요. 민영화 직후였기 때문에 인프라 구축 및 고도화 관련 일이 많았어요. 신입이었지만 일정 규모의 프로젝트를 맡게 됐습니다.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관리부서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회사에 대해서도 잘 알게됐죠. 그리고 회사 최초의 인터넷 기반 사내교육 시스템도 타 부서 동료들과 함께 개발했어요. 재미와 보람을 함께 느꼈습니다."▶SKT에서 이룬 가장 큰 성과는 무엇입니까."인터넷 붐이 일고 있던 1998년이었어요. 회사 내부적으론 '경쟁에서 이기려면 치고 나가야한다'는 분위기가 강했죠. 무선인터넷 TF에 속하게 됐습니다. 저도 사실 무선인터넷에 대해 잘 몰랐는데 사내 인트라넷 구축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뽑혀온거죠."▶무선인터넷 TF가 가장 먼저 어떤 걸 시도했나요."사람들이 노트북이나 PDA로 무선인터넷망에 연결해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죠. 그래서 PC를 무선인터넷망에 연결해주는 접속프로그램 '접속(jubsok)'과 이를 중계해주는 웹 프록시 서버를 제가 개발했습니다."▶한국 최초의 무선인터넷 서비스네요."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대법원장이 회사에 연락을 주셔서, 개발자인 제가 직접 자택을 방문해 설치해드리기도 했습니다."▶서비스는 인기를 끌었나요."무선데이터망 속도가 9.8kbps(킬로바이트퍼세컨) 밖에 안됐어요. 그래서 이미지압축을 통해 전송량을 줄여주는 알고리즘을 광운대 연구팀과 함께 개발했죠. 3배 정도 빠른 속도를 확보해 통신사의 데이터망 구축 경쟁에서 SKT가 우위를 갖게 됐어요. 거의 모든 언론에 나왔고요. 사장실에선 5000억원짜리 일을 해냈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SK그룹 회장실에 초대돼 '그대들이 보배'라는 칭찬까지 들었죠."▶유학은 미뤘겠네요."네. 당시 굉장히 뿌듯했고 시장에서 제가 한 걸 인정해주니까요. 더 큰 걸 잘 하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또 회사도 저를 '주니어매니지먼트포럼'이라고 미래의 경영자를 키우는 프로그램에도 넣어줘고요."▶이후 더 큰 프로젝트를 맡게됐다고요."네. 그때까지는 무선인터넷에 접속만 했는데 앞으론 진짜 IP망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표준단체인 3GPP에서 추진하던 WAP(Wireless Application Protocol)이란 무선인터넷 기술을 상용화하는 프로젝트였죠."▶순탄하게 진행됐나요."아니요. 세계적으로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상용화한 케이스가 거의 없었어요. 관련 솔루션 업체들이 최소 몇 백만불의 솔루션 가격을 제시했죠. 회사에서 배정받은 예산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와 팀 선후배들은 '차라리 우리가 해보자'고 생각했어요."▶혼자 힘으론 못했을텐데요."적은 예산으로 무선 인터넷 서비스 관리 시스템을 함께 개발할 IT 업체를 찾아야했죠. 가장 적절한 업체였던 '한국 디지탈 라인(KDL)'에 가서 '비용은 많이 지원해주지 못하지만, 무선인터넷이라는 앞으로 크게 성장할 시장에서의 경험을 함께할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어요. 결국 KDL과 함께 WAP 기반의 새로운 무선인터넷 서비스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이 플랫폼으로 무엇을 했나요."모바일에 특화된 벨소리, 배경화면, 게임, 영화, 증권 같은 서비스뿐만 아니라 인터넷 검색 서비스도 가능하게 됐습니다. SK텔레콤은 당시 'n. TOP'이라는 유무선 서비스를 출시하게 됩니다. 아마 통신사가 유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 것은 세계 최초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네이버의 이해진 대표나 싸이월드의 이동형 대표 등도 만나서 업무 협의를 했었어요. " 글로벌 시장 가고 싶어 벤처 공동창업…나스닥 상장 주역▶SKT에서 성공가도를 달렸는데, 변화가 있었다고요."글로벌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마침 'TTL'이란 브랜드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30대에 임원을 달았던 당시 서진우 상무(마케팅전략팀장)님이 "무선인터넷을 갖고 해외로 가보자", "20년 후엔 소프트웨어 업계의 삼성전자가 돼보자"고 하셨습니다. 해외 솔루션업체들을 볼 때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SK텔레콤을 그만두고 사내 스타트업 '와이더댄'의 창업 멤버 7명 중 한명으로 들어가게됐습니다. 당시가 2000년 제가 31살때입니다."▶와이더댄의 초창기 사업은 어땠나요."SKT 프로젝트를 주로 하다가 2년차 때 부턴 무선인터넷 해외사업에 집중했습니다. 벨소리, 배경화면 등의 사업을 하는 협력사들과 함께 협업했고요. 첫 고객은 이스라엘의 '오렌지'사였고요. 첫 고객과 성공적으로 사업을 개발해보니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대만의 APBW 같은 통신사도 고객으로 확보했죠. 열심히하다보니 노키아벤처스, 일본 소프트뱅크 등으로부터 투자도 유치할 수 있었습니다."▶와이더댄은 주로 어떤 서비스를 제공했나요."한국에서 좋은 걸 가져가서 해외에 소개하고 판매했죠. 당시 한국에서 '컬러링'이 떴어요. 이걸 갖고 나가고 싶었는데, 미국이나 유럽은 GSM 방식이라 한국의 CMDA와는 차이가 있었죠. 열심히 GSM에 대해 공부를 하고 에릭슨, 지멘스, 알카텔 같은 곳들에 연락해서 소개도 했고요. 이 중 알카텔이 호응을 했고. 함께 세계 최초의 GSM 기반의 '링백톤'(한국의 컬러링) 솔루션을 완성했습니다."▶링백톤(한국의 컬러링) 때문에 와이더댄이 일어선거네요."링백톤 사업은 와이더댄을 글로벌 시장에서 모바일 음악 서비스 주요 플레이어로 고객사들과 경쟁사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죠.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모바일 음악 서비스 리더가 되기 위해 모바일 음악에 대한 주요 음반사의 기대와 우려 그리고 애로사항을 해결할 솔루션을 찾게됐죠."▶음반사의 요구를 반영해 어떤 서비스를 개발했죠."당시 애플이 아이튠즈(iTunes) 서비스를 하면서 음원 가격 등과 관련해 음반제작사들에 공격적인 요구를 했어요. 업계는 아이튠즈의 대안을 찾았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중심으로 저는 'Full Track Music Service Platform'을 기획하게 됐어요. 사용자가 단말기에서 음악 전곡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고, 스트리밍으로도 들을 수 있는 서비스였죠. 통신사업자는 다양한 음악 상품을 구성할 수 있고, 음반사는 음원 매출을 바로 정산받을 수 있게 하는 시스템도 구축했습니다."▶나스닥 상장의 주역이 됐다고요."마침 시장의 니즈와 맞물려 한국에서는 '멜론'이라는 국내 최초의 음악 전곡 스트리밍 서비스에 제가 개발한 기술이 적용됐습니다. 미국에서는 최대 사업자인 버라이존의 음악 서비스 플랫폼으로 채택됐어요. 세계적인 리서치 회사인 'Frost & Sullivan'에서 선정한 2006년 차세대 음악 서비스 플랫폼으로 선정되기도 했죠. 그리고 국내 시장에서의 안정적인 서비스와 더불어 이러한 해외 사업에서의 성과와 글로벌 상품의 지속적인 개발을 통해 2005년 12월에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게 됐습니다." 와이더댄 매각 후 스타트업 창업…투자유치에 실패하며 사업 보류▶상장 이후엔 계속 잘 나갔겠네요."음악 서비스를 어떻게 확장할 지 전략을 짜고 있었는데 '와이더댄'이 팔린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임원이 창업한 '리얼네트웍스'가 인수했어요."▶리얼네트웍스에선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링백톤 뮤직 사업을 계속 챙겼죠. 유럽 시장 공략도 했고요. 그러다가 2008년 경제위기가 오고 회사가 몸집줄이기에 들어가더라고요. 2009년 2월에 결국 나왔습니다."▶와이더댄에서 나온 심경이 어떠셨어요."한국으로 돌아갈까했는데, '여기서 돌아갈 순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미국에 있기로했습니다. 나스닥 상장사의 공동창업자였으니까 자금 측면에서 여유도 있었고요. 창업을 결심했습니다."▶어떤 사업을 하고 싶으셨어요."스마트폰 시장이 보이더라고요. 믿으실 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을 통한 '무료 문자 메시지' 사업을 생각했어요. 2009년에 왓츠앱이 연 1달러만 받고 메시지를 공짜로 보내는 사업을 했는데, 저는 완전한 무료를 고민했죠. ▶지금의 카카오톡과 비슷한 것이네요."네. 창업하고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람 구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안드로이드 초기라서 엔지니어들이 거의 없었고요.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을 버렸고, 이후에 2010년 3월 카카오톡이 나왔습니다."▶실망이 컸겠습니다. 그 다음엔 어떤 것을 기획하셨어요."그룹 메시징을 고민했어요. 메시징 플랫폼이 있으면 '여러 사람이 대화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스마트폰에서 그룹을 만들고 메시지를 주고 받는 일종의 동호회를 생각했어요."▶네이버 라인 같은 서비스네요."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비슷하더라고요."▶출시하는데 성공하셨나요."개발까지 완료하니 2011년 하반기가 됐습니다. 이제 출시를 해야하는데, 3년 간 제 돈을 다 써버린겁니다. 투자 유치를 해야하는데 저는 개발자였지, 투자유치나 영업을 해본 적이 없었더라고요. 3개월 동안 투자자를 구하려고 했는데, 안됐습니다."▶선택의 갈림길에 섰겠네요."미국에서 동양인이 현지에서 투자를 받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더라고요.저는 '팀원들하고의 약속을 지속할 수 없으면, 배신하지 말고 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눈물을 머금고 '사업 보류'를 선언했죠. 준비해서 연락하겠다고 하고서요."▶사업을 해보니 무엇이 가장 힘들던가요."사람 찾는 게 제일 어려웠죠. 저는 회사 다니면서 혼자 개발하는 걸 잘 했는데, 사업은 혼자 다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월급을 보고 들어온 사람은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더라고요." 삼성전자 몸 담으며 앱 서비스 향상에 기여 ▶막막하셨을텐데, 어떻게 이겨내셨어요."삼성에 아시는 분이 계셨어요. 실리콘밸리법인에서 모바일 안드로이드 앱 사업 관련 일을 해보자는 제안이 왔어요. 사업을 포기한 건 아니었어요. 좋은 사람을 만나며 기회를 보자는 생각이 강해서 삼성을 택했습니다. 그 때가 2012년 6월께였습니다."▶삼성전자 실리콘밸리 법인에선 무슨 일을 하셨어요."외부 업체들과의 스마트폰 앱(App) 파트너십 업무를 했습니다. '공동개발 파트너십'을 생각했어요."▶기존 앱 파트너십과 뭐가 다른거죠."일회성 관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윈-윈' 하는거에요. 스마트폰 유저들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줄 수 있는 앱을 공동으로 개발했어요. 삼성은 앱 개발사에 마케팅과 시장을 제공한 것이고, 앱 개발사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고객들에게 가치를 준 것이죠."▶성공 사례가 많이 나왔나요."2015년부터 익스피디아, CNN, '더 웨더' 등과 협업했어요. 앱 회사들과 삼성 스마트폰 앱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많은 것을 시도했습니다." 50대 나이에도 교육 스타트업 창업 도전▶창업을 다시 준비하게 된 계기는요."자신에 대한 성찰을 시작했습니다. 일단은 '나를 다시 채우자', '새 기술을 담자'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카네기멜론대 대학원 소프트매니지먼트 석사과정을 시작했고요. '공부 마치고 뭐하지'를 고민해보니 스타트업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 해보자'란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10년 전과 달리 준비가 잘 되고 있나요."작년부터 팀을 구해서 AI 관련된 것을 해보려고 했는데요. 디자이너, 기획자는 구했는데 엔지니어를 못구하겠더라고요. 요즘 AI 엔지니어 구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그래서 생각하신게 교육쪽인거죠."네. AI가 아닌 일반기술로 고객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걸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뭘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더니 '교육'이 떠올랐어요. 삼성에서 꾸준하게 했고 마지막에 담당했던 것도 '러닝(learning)' 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했던 것도 교육이고요. '양질의 교육'은 UN이 발표한 17개의 지속가능발전목표에도 들어가있을 정도로 중요하죠."▶교육은 국가별로 특성이 다 달라 글로벌 사업이 어렵지 않을까요."아니요. 교육시장은 로컬이 아닙니다. 보편가능한 교육서비스가 가능해요. 저희 아이들을 보면서 '공부 습관 들이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상위 5%와 못하는 하위 5%를 뺀 90%의 학생들이 스스로 시간을 컨트롤 할 수 있게, 공부를 하고 싶게 하는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어요."▶기존 교육 서비스와는 뭐가 다른거죠."철저하게 '학생' 입장에서 고민하고 있어요. '공부를 시킨다'는 공급자 마인드가 아니라 공부를 알아서 하게끔 하는 '데일리 러닝' 솔루션이죠. 이미 기본컨셉은 나왔고요. 프리베타 서비스를 출시하고 반응을 볼겁니다. 목표는 내년 2~3월 출시하는 것이고요."▶50대에 계속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있다면요."전 새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공무원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직장생활 초기 때 1년 간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회장님한테 칭찬도 들었죠. 두렵지만 소신을 갖고 하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됐어요. 그리고선 두려움이 없어지고 더 열심히하게됐죠. 나이는 무관한 것같습니다." 실패에 대해 격려하고 새로운 시장에 도전해야▶기술이 시시각각 변하는 데 적응이 어렵지 않나요."전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20대 때 인터넷, 30대 땐 무선인터넷, 40대엔 스마트폰 시대를 겪었죠. 50대인 지금은 AI 시대입니다. 저는 지금 AI 시대의 초창기에 있기 때문에 '기회'라고 생각해요. 뭔가 기회를 갖고 있는 건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어요."▶보통 50대는 '지키는 시기'인데요."50대의 고민은 은퇴입니다.무리하지 말고 벌어놓은 것을 지키라고하죠. 저는 지키기위해선 적극적으로 개발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더 나이들기 전에, 새로운 걸 할 수 있을 때, 버릴 수 없는 기회가 쌓이면 그게 내 은퇴 시기를 지키는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젊을 때보다는 리스크 관리가 필요해요. 저는 스스로 리스크를 고려하면서 사업을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성과'를 꼭 만들고 싶어요. 10년 전 '무료 인터넷 메시지' 출시 못 했던 것이 기억나요. 애를 낳는 심정으로, 자생적으로 키울 생각입니다. 내가 준비가 되면 투자자에게 말을 하고 성과를 낼 겁니다."▶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기술은 뭔가요."AI와 빅데이터는 기본이고요. 가상공간, 메타버스에 관심이 많아요. '제3의 인터넷'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수요가 생기고, 공급도 발생해요. 페이스북이 메타버스를 가려는 이유가 명확합니다(페이스북이 메타로 사명을 바꾸기 전에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금 유무선 인터넷 시대가 끝나갑니다. 그래서 제3의 인터넷, 가상화 공간으로 가려는 것입니다."▶빅테크들이 우주에도 관심이 많습니다."메타버스로 가는 것과 비슷해요. 달에 생산기지를 만들면, 물류가 혁명적으로 변합니다. 서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비행기 10시간인데, 달에서 한국, 미국까지 가는 데 몇 분이나 걸릴까요. 우주는 새로운 시장입니다."▶얼마전 한국도 누리호를 발사했죠." 누리호 발사는 한국의 우주 계획 중 첫 단계인데, '미완의 성공' 이런 평가가 가슴이 아파요. 누리호를 준비하던 분들은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을 하면서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을까요. 격려하고 칭찬해줘야합니다. 그리고 젊은 분들도 '지금 보고 있는 곳'보다 다른 뷰 포인트로 보면 다른 기회가 많을 것 같아요. 세계에서, 새로운 시장에서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바뀌어야한다고 봅니다. '빨리빨리'가 아니라 자주해야합니다. '애자일'이 필요한 게 잘 모르니까 자주 하면서 개선하라는 것이거든요. 애플이 창조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 개선한거죠. 그런데 혁명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크리에이터가 되고 이노베이터가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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